Rondrina, Bsazil
 
보이지 않는 계수

인간의 활동은 마치 기계와 같이, 처음의 질서를 급히 해체하여 어떤 강력하게 조직된 물질을 점점 커지다가 언젠가는 명확해지게 되는 타성의 조건으로 빠뜨린다고 Claude Levi Strauss는 말한다. 물론 도시도 세웠고 땅도 경작했지만 인간은, 수백만 개의 구조들을 즐겨 분해하여 그 요소들을 재결합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르게 했고 이 역시 일정한 타성을 생기게 하며 고유한 범위와 속도를 그 속에 함축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는 인간 경험의 진정한 조건을 받아들이고, 그것의 한계와 리듬을 벗어나는 것은 우리 힘 밖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편이 낫다.

태양과 달의 계수
인간과 환경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의 요인들 중에서 보이지 않는 일종의 법칙이 혹은 그 법칙의 부재에 대한 모색이 생각이 출발점이 된다. 국지적 상황으로부터 거시적인 생각의 틀을 제안하고자 함에 있어서,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일종의 계수 혹은 법칙을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여기서 ‘계수’와 ‘법칙’라는 용어의 사용은, 상황에 대한 관찰이나 조사에 대한 만족에 그치지 말고 기본법칙의 탐구를 제안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하고 포괄적인 법칙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더 진보한 사고를 만들기 위한 가설을 내세워, 증명과 변명과 반박을 받고자 의도한다.

1920년 이전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브라질의 론드리나.

1980년 호주의 캔버라를 모델로 탄생한 창원시.

도시의 첫 번째 길들은 교통수단과 같은 방향으로, 두 번째 길들은 그것을 차단하거나 가로지르며 상업이나 그 밖의 사업을 위해서는 첫 번째 길 연변을 택하게 될 것이며, 다음은 정반대의 이유로 개인의 거주지와 몇몇 공공기관은 두 번째 길을 택하거나 아니면 그곳으로 가도록 강요를 받는다는 것을 읽게 된다. 중심지와 변두리 간의 대립, 그리고 평행과 수직간의 대립의 결과에 의해 네 가지 상이한 도시 생활양식이 결정지어지며 이 요인들이 미래의 주민을 형성시키는 한편 교류와 자유의 대립적 가치는 새로운 대위법을 조직한다.

다양한 가치를 추종하는 인간의 무의식적 거동을 재촉하는 것은 도시가 좁은 공간 위에 실현하는 예외적인 인간의 집결과 그 주거의 지속을 통하여 시련 속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
성극(成極)작용의 축은 모든 생활지가 가지는 집합의식이라는 특권이라는 강력한 요인으로 인해 크나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무수한 대립적 가치들의 대위법에 비해 좀 더 단순하고 강력한 계수가 존재하기도 한다. 태양보다 훨씬 더 지구와 근접한 달의 인력은 조수간만의 차이를 만들어 우리의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끊임없이 변화시킨다. 인력이 지구의 물을 당기는 힘이 강해지거나 약해지면서 만들어지는 갯벌과 바다의 시간은 밤낮으로 이분되는 육지의 시간과 다르고, 일상생활을 결정하는 기준도 달라진다.

자연과 자연적인 것
최근 디지털 툴 자체가 디자인의 중요한 결정요건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과학적 이해에 의존하거나 의식적 예측을 활용하지 않고서 복잡한 환경 속에서 진화를 통한 기능의 적응을 자연계의 특징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한편 인류학자들은 자연계를 형성하는 부분 중 하나로서 인간의 경험을 중시하며, 환경과 인간의 상호작용으로 완성되는 일종의 체계를 확립하고자 한다. 우리가 향수를 느끼는 자연은 인간의 손이 가해지지 않은 야성 그대로의 자연은 아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풍경이란 우리들의 욕구와 필요에 전적으로 복종되어 있는 것으로서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자연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 폴란드의 비알로비에자 숲처럼 의도적으로 인간에게 차단된 야생의 자연과 우리가 자연적이라고 부르는 풍경의 전통적인 범주 사이에는 분명한 괴리가 있다. 인간과 대지와의 세심한 상호관계는 생산과 약탈로 인해, 마치 야외의 공장으로 파괴되어 야생보다 더 격하되거나 ‘풍경’이라고 불릴 수준으로 재 상승되는 상반된 양상으로 변형되었다.

시간의 단위
달력은 천문학에서 시작되었다. 우리의 24시간은 지구의 자전과 같고, 우리의 한 달은 달의 공전과 똑같고, 일 년은 지구가 태양의 궤도를 공전하는 것과 똑같다. 시간성의 개념은 지속성과 동시에 분절성의 의미를 내포하며, 상대적 개념이다. 시간의 단위에 매겨있는 처음과 끝은 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설정해놓은 것에 불과하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자전과 공전의 운동에 처음이 있고 끝이 있을 수 없다. 적당한 지점에서부터 출발하여 다시 그 지점에 돌아오면 또 새로운 시간의 단위가 시작된다고 선을 그어 놓은 것이다. 연속적인 정보신호에 비연속적인 숫자를 대응하여 붙여놓은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관계와 비슷하다. 더 나아가 일정 부분을 경과하면 다시 반복하도록 설정해 놓았다. 해와 달에서 얻어온 단위 위에 십 년(decade), 백 년(century), 천 년(millennium)단위까지 인위적으로 만들어 순환시키고 있다.

역사상의 시대 구분이 필요한 사실이라기보다 가설이나 사상의 도구이며 그 유효성은 역사의 해석 여하에 달려있는 것처럼 시간의 단위는 환경과 정신의 정립을 위해서 각각의 문화가 스스로 규정한 것이다. 갯벌에서는, 한 달을 둘로 나누고 그것을 열닷새로 나누어 한 물, 두 물, 세 물 등으로 부른다. 고전이나 무협지를 보면, 시진이라고 해서 하루를 12시간으로 표시하고 하룻밤을 5경으로 나누고, 밥 먹을 때 걸리는 시간을 ‘식경’(30분), 뜨거운 차를 한잔 마시는 데 걸리는 시간을 ‘다경’(15분~20분)이라고 한다. 이슬람 음력은 태양 태음력과 달리 윤달이 없어서 무조건 12개월이면 1년이 된다. 그래서 나중에는 월과 계절이 전혀 안 맞게 된다. 일주일은 토요일에 시작되며 매일 다섯 번의 기도시간이 정해져 있다. 삶의 공간과 행위 그리고 정신과 연결되어 만들어진 각자의 시간 단위는, 우리가 환경을 읽고 구축하는 방식에는 어떤 차이를 만드는 것일까? 보편성과 합리성 그리고 유일적 속성은, 개별성과 특수성 그리고 관습적 속성과 경험과의 균형은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

지형으로서의 건축
건축과 환경은 지형이라는 새로운 접점을 만들기도 한다. 지구 표면의 특징적인 상태를 말하는 지형(topography)는 지구의 내적인 힘으로 만들어진 지표면에 가해진 외적인 힘에 의한 변형으로 형성되는 것이다. 지형의 형성은 시간성과 기후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는데, 인간의 의식과 환경을 지배한다는 의미에서 거대한 건물은 거의 지형의 반열에 올랐다고도 할 수 있다. 파나마 운하는 건축이 지구에 입힌 상처와도 같다고 한다. 자연은 항상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려고 애쓰면서 그 상처를 치유하고자 하고 인간은 그것을 막으면서 관리 혹은 자연친화라고 말한다. 운하를 지나가도록 배 한 척을 띄우려면 19만 700리터의 물이 필요하다. 가둬놓은 강에서 중력에 의해 떨어지는 물을 이용하며, 이 물은 배가 운하를 빠져나갈 때 바다와 같이 흘러나간다. 중력이야 언제나 얻을 수 있는 힘이지만, 갑문을 열고 닫는 전기는 사람의 통제와 결정을 거친 시스템이 없다면 단 하루도 견디지 못한다. 우리를 둘러싼 건축과 환경은 실제로는 보이지 않는 제어로 아슬아슬한 균형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epilogue
인간은 누구나 매일 조금씩 무언가를 잊으며 살아간다. 망각의 약점이 없었다면 문명의 대부분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억을 유지하기 위해서 기록하고, 기록의 장치와 용량에 대한 욕망은 기술을 부추긴다. 건축도 일종의 기록이다. 자의든 타의든 무엇을 기록할 지 선택하고, 어떻게 기록을 연출하며 얼마나 지속시킬 것인지 숙고한 결과가 바로 개념(concept)이며, 양식(style)이며, 구조(structure)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는 경계가 없는 소셜 네트워크에 대한 갈망과 나란히, 살고 있는 물리적 환경과 미세한 변화에 더욱 민감해지도록 만드는 역설의 세계를 살고 있다. 보편적 진리와 합리성에 기반을 현대의 건축은 우리 시대에 와서 어느 순간보다 장소와 문화의 협소한 테두리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반응하는 환경에 대한 생각의 집중은, 정신과 환경을 유도하는 보이지 않는 일종의 계수와 변화의 공식의 존재를 감지하거나 혹은 이보다 더 강력한 무엇인가가 그 공식을 무마시키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도록 생각의 폭과 깊이를 확장하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