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작가 2010년 제 13호
 
공간(空間)과 외면(外面) _ 이중의 방1

이 도시는 이상한 곳이다. 자신을 스스로 드러내지 않으면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다.
_ Le Clezio 2


도리스 레싱의 『런던스케치』3 에는 제목이 무색할 정도로 도시의 풍경이나 공간의 묘사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소외된 인간의 냉소만 존재할 뿐 그들의 배경이 되는 장소나 이미지의 묘사는 매우 제한적이다. 줄리는 런던 외곽 한 구역의 버려진 적재장 구석의 빈 창고를 눈여겨보아 두었다. 비가 내리던 날 밤, 비에 젖은 개 한 마리가 지켜보는 가운데 그곳에서 아이를 낳고 탯줄을 자른다. 자궁과 부산물은 굶주린 개의 먹이가 되었고 수건으로 감싼 아기를 공중전화박스에 두고서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온다. 길고 더러운 카디건으로는 그녀의 몸과 비밀스런 그 일을 감출 수 있었고, 게걸스럽게 샌드위치를 먹어치운 뒤 타인들에 대한 건조한 일상의 대화를 부모와 나눈 뒤 자신의 욕실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온전히 자신만의 공간에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그녀는 런던으로 돌아가서 학교를 마칠 것이라고 다시 꿈을 꾼다.
공간이나 장소는 우리들 인생의 배경이라고 하지만 때로는 인생 그 자체이기도 하다. 절대치로 보면 동일한 시간의 길이와 사건의 굴곡을, 공간과 장소는 우리에게 그것을 다르게 체험하게 한다.
고독하고 소심한 인간에게 도시나 가상세계의 익명성만큼 든든하고도 안전한 도피처는 없어 보인다. 진심은 보이지 않으며 도시와 공간은 아무런 성격도 가지지 않는 중성으로 늘 비어있고, 자신의 좌표를 가지지도 못한 채 우리는 상대적 궤도를 떠돈다. 그러나 공간은 단순히 ‘비워져’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일종의 복합적 현상이다.4 회화든 사진이든 시각적 표상들은 텍스트와 달리 이미 내용으로부터 분리된 형식이었던 것처럼, 형태(空間과 外面)란 생각의 내용을 해석해야만 하는 운명을 짊어진 거대한 시(poetry)이다.5

물고기의 눈 그리고 엘리베이터의 거울
사람의 수정체는 렌즈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물고기의 눈은 둥근 모양을 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몸의 양쪽에 하나씩 달려 있어서 대개 270도 이상의 시야각을 가진다. 움직이는 사물을 포착하는 데 유리하여 물속의 자신보다 강한 동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 현관문마다 달려있는 물고기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인간의 시각보다 넓은 시각인 동시에 극도로 과장하여 왜곡된 사실이다. “서로 속이면서, 게다가 이상하게도 전혀 상처를 입지도 않고,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듯, 정말이지 산뜻하고 깨끗하고 밝고 명랑한 불신이 인간의 삶에는 충만한 것으로 느껴진다”라고 고백한 요조처럼,6 보고 있으면서도 존재하지 않은 척 자신을 감추고서 반대로 외부의 상대는 고스란히 자신을 내보여야 하는 시각의 불평등 혹은 이중성에 우리는 익숙해져 있다.
공간의 기본적 속성을 초월하는 엘리베이터 속 타인과 나누는 대화는 찰나의 미소면 족하다. 그리고 거울은 나 자신을 보기 위함보다 시선을 회피하기에 더할 수 없는 좋은 도구이다. 서양에서 거울이 자기도취적 물건으로서 거울 속에 비추인 자기 모습을 보는 목적으로만 거울을 이해한다고 본 반면, 동양의 거울은 늘 비어 있으며 상징의 공허함을 의미한다고 했다.7 도시의 외면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거울, 아니면 나를 감추는 가상의 투명함과도 같다.

현기증 그러나 지루함
방금 벗어난 건물을 다시 돌아 올려다본다. 나의 공간을 찾기 위해 숫자를 센다. 외면에서 나의 공간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엘리베이터는 불가능한 높이를 개인에게 가져다주었지만, 하늘과 이들 사이에 벌어진 거리만큼이나 불평등에 시달리게 하기도 한다.8 하지만 그 이전 도시의 고도계는 사회적 위치의 빼놓을 수 없는 척도인 시대도 있었다. 높은 지대에 사는 사람일수록 사회적 지위가 낮았고 가난한 이들이 극복할 수 없는 것도 바로 지형의 높이였다. 구축의 기술이 발전하고 도시라는 거대한 그림 속에 개인의 공간은 요소로 규격화되어 쌓여 올라갔다.
우리에게 영웅적인 용기를 주었던 계단을 빼앗아 버렸다고 했던가. 포장된 지면에서 지붕까지 방들이 포개어 쌓아 올려져 있고, 지평선 없는 하늘의 천막이 도시 전체를 둘러싸고 있다고도 했던가.9 도시 전체는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거대해지고 아찔할 정도로 높아졌으나 개인의 공간은 겨우 한 층 속에 박혀있을 뿐이다.
“머리 위에서 불을 때고 그 머리 위에서 또 불을 때고, 오줌똥을 싸고, 그 아래에서 밥을 먹고, 그러면서 자식을 키우고 또 자식을 낳고, 사람이 사람 위에 포개지고 그 위에 또 얹혀서 살림을 하고 살아간다는 것이다.”10 “낯설고도 친숙한”11 주거공간이자 도시주택의 전형인 아파트는 도시 형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마치 영화나 연극의 한 장면을 위해서 급조된 듯한 외관만을 자랑하게 되었고, 그 안에서의 삶은 외부적 규모와 높이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퍼블릭 스페이스와 카페
공공장소가 모두 반드시 공익적일 필요는 없고 미디어가 모두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는 가족보다 좀 더 개방된 사회적 관계, 즉 타인을 향한 떨림과 같은 욕구가 존재한다. 18세기에는 갤러리나 미술관 등의 사회적 공간이 있었다. 사회적 공간은 초기 근대 유럽의 이른바 공공영역의 한 부분을 형성한다. 공공영역은 커피 하우스에서부터 극장에 이르는 사회적 제도의 연속체인데 그곳에서 개인들은 이른바 공공(public)을 형성하는데 동참했다고 할 수 있다.
1675년 런던의 터키스 헤드 커피 점에 다음과 같은 공고가 붙었다. “이곳에는 높고 낮음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십시오. 그저 적당한 빈자리를 찾아 앉으시기 바랍니다. 어느 누구도 높은 사람이 왔다고 해서 일어나 자리를 양보할 필요가 없습니다.”12 상업공간은 이처럼 커피 한 잔만으로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자신의 공간을 가능하게 했고 이는 심리적으로 일부 공간에 대해서는 이용자의 평등을 가져왔고 더 나아가 현대도시에서는 또 다른 갈망의 대상으로 승격된다.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는 <파리의 우울>에서 냉혹한 삶과 완벽한 감수성의 공간을 대비시키며 이중의 방을 말하고 있다. 현대 사회의 삶과 공간은 이러한 이중의 방을 찾고 있다. 일상 혹은 업무 공간과, 휴식 혹은 쾌락의 또 다른 개인의 공간이라는 이중적 구조를 필요로 한다.

새 표지판과 약도
누군가 내게 길을 묻는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고민하며 주위를 둘러보다 이 거리에 새 표지판이 붙어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언제부터 있었던 걸까? 명명의 원칙은 고사하고 낯선 그 이름을 과연 나의 설명 어디에다 넣어야 하는 지 순간 혼란스럽다. 작은 종이를 꺼내 약도를 그렸다. 사거리를 그리고 약국과 교회를 표시하고 분명히 보게 될 간판에 대한 설명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근처 가서 다시 한 번 물어보라고 덧붙였다.
서구 도시의 대표적 지표들인 성당이나 시청, 역사적 기념물에 부여되는 신성한 특질이 결여되어 있어서 우리는 시각적 이미지로서의 건축을 기호화하지 못했다. 도시 내에서 그 건물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와 형태만으로도 충분히 그 기능을 나타낼 수 있다면13 우리는 간판이나 표지에 덜 의지하게 될 것이라고 했지만, 사실 우리에게는 근대 일본의 영향 이전의 건축 혹은 건설에서 유형이란 큰 의미가 없었다.
인간 기반의 사고 영향 아래 모든 건축의 유형적, 외형적 구분은 존재하지 않았다. 건물의 규모만 다를 뿐 개인의 집이든, 궁전이든, 학교이든, 신전이든 모두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유럽에서 발달한 신전이나 성당과 같이 기념비적인 종교 건축물이 없었고 모든 건축물은 사람이 거주하는 집을 기본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현재 이 도시에는 주소가 없다. 배달원에게나 네비게이션 입력을 위해서는 절대적일지 모르나 숫자나 문자인 주소가 전혀 와 닿지 않는다. 롤랑 바르트는 도쿄를 주소가 없는 곳이라고 했다.7 그러나 이곳에서 공간의 이해는 몇몇 편법을 사용하여 조합해서 독자적인 하나의 인식 체계를 만든 위에서 성립된다. 말하자면 기차역 등 이미 아는 거점을 출발점으로 삼아 특정 장소를 알아보게 만드는 (손으로 직접 쉬어지거나 인쇄된) 일종의 지리적 요약본인 약도를 통해 주소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쿄와 마찬가지로 이 도시도 직접 걸어 다니면서 눈으로 확인하고 관습과 경험을 통해 알아내야 한다. 찾아가는 길에 대한 결정적인 모든 요인들을 시각적으로 경험하게 되고 이후 남겨진 흔적의 기억을 통해서만 장소와 공간은 발견될 것이다. 비논리적이고 쓸데없이 복잡하며 신기할 정도로 이질적이라 하더라도 이미 우리만의 체계를 발견하여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지표는 서술적이며 기억의 강도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인지하고 있으나 객관적 지표와 겹쳐져서 체계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가상의 공간
언어학적인 정의만으로는 문화라고 부를 수 있는 모든 현상들을 설명하고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인정하듯이, 공간과 외면의 분리는 이미 시각적 표현들의 모사와 해석이라는 속성에서부터 출발점을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근대의 관심은 움직이는 시선, 즉 근대적 체험형식들은 단순한 움직임임이 아닌 움직임과 시선의 접합점, 즉 움직이는 그림들에 의존했다. 그러나 이미지의 관점에 대한 선택이 불가능했고 영화나 TV에서는 카메라의 시점이 곧 우리의 시점이었다.
이제 가상적 환경에서는 의지에 따라 자신과 공간의 관계를 바꿀 수 있다. 이 환경 역시 구축의 원리나 구성요소는 별반 다르지 않지만 가상성의 체험은 오랫동안 사실이 아닌 것에 대한 수동적 관조였으나 컴퓨터가 생성한 환경은 가상성의 상호작용적 버전이 되었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공간의 조작과 시점의 형성, 이미지 도구의 활용이 일반화된 것에 비하면 실제 도시와 공간은 환경으로부터 자립성과 순수성을 추구하면서 오히려 유연성을 잃어버린 듯하다. 가상적 환경에서는 의지에 따라 자신과 공간의 관계를 바꿀 수 있는 것에 비하면 실제의 공간과 도시의 외면은 되 돌이킬 수 없는 견고함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가상의 공간 역시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문화적으로 결정되는 공간이다. 표현의 도구 기저에는 인간의 의식과 역사적, 사회적 지향점이 애초부터 존재하고 있어서 진정성이 의심을 받으면 존재할 수 없다. 나는 오히려 현재 도시와 건축의 외면(外面)이 공간과의 인본적 관계를 넘어서(혹은 벗어나) 연출하고 있는 독자적 풍경이 매우 두렵다. 마치 인과관계와 체계적 발전으로부터 해방된 가상공간처럼 역동적이고 매혹적이지만, 여전히 건축을 바라는 폐쇄적이고 구심적인 사회의 지표로 지속될 것이 두렵다.

1.파리의 우울(원제: Le spleen de Paris)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민음사, 2008 ‘이중의 방(La chambre double)’에서 인용
2.사막(원제:Desert) 르 클레지오, 문학동네, 2008
3.런던스케치(원제: London Observed:stories and sketches), 도리스 레싱, 민음사, 2003
4.비주얼 컬처의 모든 것 (원제:An Introduction to visual culture), 니콜라스 미르조에프, 홍시, 2009
5.사라진느(원제:Sarrasine) 오노레 드 발자크, 문학과 지성사. 1997 ‘미지의 걸작’에서 인용
6.인간실격(원제:人間失格), 다자이 오사무, 민음사, 2004
7.기호의 제국(원제 L'Empire des Signes), 롤랑 바르트르, 웅진, 2008
8.대구경북의 도시공간과 문화지형, 이득재, 문학과학사, 2010
9.공간의 시학(원제: La poesie de l'espace), 가스통 바슐라르, 동문선, 2008
10.비탈진 음지, 조정래, 해냄출판사. 1999
11.간이역에서 사이버스페이스까지, 최재봉, 이룸, 2003
12.커피견문록(원제: A Devil's cup), 스튜어트 리 알렌, 이마고, 2005
13.보이지않는 도시들(원제: La Citta invisibli), 이탈로 칼비노, 민음사. 2007